별안간 '집'

혼자 산 지 1년 10개월 23일째.

 

전세 계약 만료가 6개월 남은 시점에서 HUG(주택도시보증공사)로부터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유의사항이 담긴 문자를 받았다. 그로부터 약 2개월이 지났을 무렵엔 임대인이 먼저 계약 연장 의사를 물어왔다. 처음 집을 구하던 때가 생각났다. 종일 청년주택카페며 부동산 어플을 들락거렸다. 매물 사진이 마음에 들어 약속을 잡으려 치면 해당 페이지가 삭제되었다 다음 날 똑같은 게시물이 올라왔다. 여차저차 집을 보기까진 했는데 도무지 타협이 안 되는 하자를 발견하거나 보증보험 가입이 되지 않는 물건도 꽤 있었다. 혹시나 싶어 떼어 본 등기부등본에서 집주인의 세금 체납 이력을 알게 되는 경우, 중기청은 취급 안 한다는 중개인의 괜한 참견을 견뎌야 할 때, 여건이 되지 않아 계약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 등······.  집을 구했어, 이 결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하는지 몸소 알게 됐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보러 간 건 정말이지 우연이었다. 주말 아침, 매물 하나를 봤는데 이대로 돌아가기 아쉬운 데다 마침 저녁 일정까지 시간이 남아서 근처의 아무 부동산이나 들어갔다. 중개인이 LH로 계약된 매물이 있다며 소개했고, 집주인과 연락해 보증금 및 대출 문제를 조율해줬다. 재개발 예정지의 구옥 빌라는 관리인도 없어 어쩐지 으스스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작은 베란다가 딸려 있고, 큰 창이 두 개나 있어 낮 동안 해가 집 내부를 환하게 밝히는 점이 좋았다. 이사 당일에야 침대 매트리스 뒤 누런 벽지를 보게 됐지만 '조금 귀찮게 됐네.' 싶은 정도였다. 세탁기를 돌리자마자 도어 고장으로 젖은 빨래를 하루 이상 방치했어도 집주인이 연락이 잘 돼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싱크대 하부장 호스에서 물이 새는 바람에 주말을 조금 망쳐도 격한 환영인사 쯤으로 여기자 싶었다. 세면대 호스가 부식돼 누수가 생기고, 보일러를 뜯어내야 하는 순간에도 '이걸로 끝이겠지.' 부러 마음을 다독였다. 아, 2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베란다 배관이 얼어 하수구에서 물이 역류했다. 이 모든 일이 3개월도 되지 않아 벌어졌다.

 

옵션 가전 제품을 수리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이건 이제 고장나면 부품이 없어요. 새로 사셔야 돼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성에 차진 않아도 생활에 큰 지장이 없다면 구태여 손보지 않은 것도 수두룩했다. 워낙 오래된 집이어서 속이 곪아 있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하나 고치면 다른 하나가 말썽인 탓에 도무지 면역이 생기질 않았다. 그러다 바X벌레를 마주친 거다. 새벽에 화장실 문을 열었는데 검은 실뭉치가 샤샥- 하고 굴렀다. 집에서는 좀체 안경을 끼지 않아서 정말 그렇게 보였다. 아, 큰일났다.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방역 업체에 연락을 하고 방문 일정을 잡았다. 당일 자정이 가까워져서야 끝난 퇴치 작업에 퇴근 후에도 제대로 쉬질 못했지만 일이 일단락되었다는 안도감이 훨씬 컸다. 그렇게 열흘 정도가 지났을까. 신발을 벗고 불을 켜는데 벌레 서너마리가 방 안을 헤집고 있는 게 아닌가. 그날은 뜬눈으로 밤을 새다시피 했다. 서럽고 억울한 감정이 비집고 나와 참을 새도 없이 울음이 터졌다. 내 생활이 너무 낡고 너저분해서 화가 났다.

 

한동안 숨을 고르는 날들이 이어지고 남은 여름은 이걸로 무사히 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야만 했는데······, 변기의 앵글 밸브가 고장났다. 갑자기 이놈의 집구석이 너무 지긋지긋한 거다. 청소기를 돌리지 않고 주말을 보냈다. 냉동고 온도 조절 장치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 AS를 접수했다가 취소했다. 화장실 배수구에 엉킨 머리카락을 치우는 것조차 귀찮았다. 동네를 걸으면 보게 되는 것들, 하수구 위로 아무렇게나 던져져 터져버린 음식물 쓰레기 봉투나 금이 가고 깨진 낡은 외벽 따위에 기분이 푹 꺼졌다. 한참 전에 주저앉아 반밖에 닫히지 않는 빌라의 출입문과 꼬맹이 앞니처럼 툭 빠져버린 계단 난간대마저도, 내 일상에 시시각각 균열을 만들어냈다.

 

'집이란 게 대체 뭘까?' 생각했다. 가만히 배어든 생활감, 적막한 가운데 울리는 자그만 기척 같은 것들. 며칠을 고민해 고른 서랍장, 먼지 쌓인 책, 선물 받은 조명. 잔고장과 곰팡이 핀 나무 문틀, 녹슨 나사와 나만 아는 벽지의 얼룩. 벽을 사이에 둔 미지의 이웃과 빌라 복도의 게시판. 집과 집밖의 경계에서 만나게 되는 어떤 장면들. 마음을 다해 좋아하다가도 한순간 넌더리가 나고 마는, 7평 남짓한 공간을 둘러싼 안녕과 소란에 대해서. 나 지금 잘 지내고 있는 거 맞겠지?